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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츠, 대체…….”

  쿠로는 도복을 입은 채로 비에 쫄딱 젖은 테토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려서 도복에 합류하거나 손끝을 스치고, 바닥에 찰박 찰박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보다 바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금세 무도장을 적셨다. 테토라가 들어와서 가는 길마다 어떻게 갔는지 물감을 흩뿌리는 것처럼 빗물이 들어찼다.

  “테츠, 다 닦고 들어와라.”

  “알겠슴다!”

  “갑자기 두 팔을 들어 올려도 빗물이 튀니까 조심하라고.”

  비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쿠로는 어쩌면 오늘도 테토라가 비를 맞으며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나기로 인해 갑작스럽게 한파가 찾아온 다음부터 테토라는 비가 오는 날에 잔뜩 젖은 도복을 입고 무도장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찢어졌잖냐.”

  “한 번 찢어진 곳이라 계속 찢어짐다…….”

  “그것도 있겠지만, 이리 와봐.”

  테토라는 팔짱을 끼고 있던 쿠로가 손을 풀어서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것을 바라보고 성큼 성큼 그에게 걸어갔다. 쿠로는 그의 소매를 당겼다.

  “역시. 네가 성장한 거다.”

  “별로 크지 않았는데여.”

  “소매가 이렇게 짧아졌는데.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고. 2학년 때에는 새 도복을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내년에는 대장이 없잖아여!”

  내년에도 함께할 줄 알고 무심코 말해버린 쿠로는 테토라의 단호한 말에 곧 눈을 깜빡거리다가 웃어넘겼다.

  “하하, 그렇지…….”

  쿠로의 말을 끝으로 잠깐 의미 모를 정적이 흘렀다.

  “……싱겁슴다. 그러지 말고 상대해주십셔! 오늘 의욕만만임다!”

  “테츠, 옷부터 식히는 게 좋겠다. 그러다 감기 걸린다.”

  “대장! 오늘 이기면 소원 들어주십셔!”

  “응? 왜 그러냐. 그런 건 말하면 들어줄 수 있는데.”

  “정정당당하게 붙어서 얻어내는 검다!”

  “싸움을 하는 게 아니야, 테츠. 몸과 마음을 수련하고 다스리는 거지.”

  그 날은 그들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도 비가 한참이나 그치지 않아서, 쿠로는 비가 그칠 때까지 좀 더 수련하자며 조르는 테토라에게 이끌려서 비슷한 행동을 반복했다. 젖은 몸이 식을 때까지 하자며 열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테토라를 향해, 쿠로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왜 비를 맞고 들어오는 것인지, 쿠로는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시간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연하게 흘러간다.

[쿠로테츠] 미열(微熱)

w. 생각나무

  “으, 엣취!”

  “으음? 나구모, 감기라도 걸린 건가?”

  “으으, 아님다…….”

  “에……테토라 군, 하루 종일 재채기 하고 기침하는데.”

  “어라~ 테토라, 『감기』라면 느긋하게 쉬고, 『잠』에 빠져요. 『이불』을 덮어줄게요, 자장자장……♪”

  “괜찮슴다! 잠깐 연습하면 금방 나을 수 있는 정도라구요. 이 정도에 죽지 않슴다!”

  “오, 나구모. 훌륭하구나! 유성 블랙의 열정이라면 유성대는 문제없다!”

  “아직 졸업도 안 했잖슴까! 먼저 앞서나가지 마십셔! 리더는 너무 뜨거워서 문제라구요.”

  괜찮은 걸까. 시노부와 미도리는 진심으로 테토라를 걱정 했지만 치아키는 아는지 모르는지 테토라가 평소보다 무리하는 것을 받아주며 더욱 열을 내도록 부추겼다. 슬슬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언성이 높아졌다.

  “음? 가만히 있어봐라, 나구모.”

  갑자기 동작을 멈춰 세우는 치아키에게, 테토라는 은근히 싫증을 내면서도 그를 따라서 멈췄다. 자신의 턱을 괴고 무언가 생각하던 치아키는 테토라를 중심으로 한 바퀴를 돌더니 곧 흥미로운 얼굴로 감탄하기 시작했다.

  “나구모, 좀 큰 것 같구나.”

  “테, 테토라 군……! 혼자 두고 훌쩍 가지 마시오……!”

  잘 모르겠슴다. 기분 탓 아님까? 테토라는 그렇게 말했지만 치아키를 비롯해서 카나타도, 미도리도, 시노부도 동의하는 듯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테토라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 자신을 향해 기특하다며 안아주겠다고 말하는 치아키를 피해서 돌아다녔다.

  테토라는 자신의 유닛복 소매를 바라보았다. 원래도 길지 않은 소매였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금세 장갑과 소매의 거리가 길어진 듯한 기분이 들어서, 애써 소매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짧아진 소매는 금세 제자리로 돌아갔다. 더 자랄 가능성이 있는 몸은 갑자기 고통을 맞이한다. 괜히 뻐근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감기 때문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음, 그렇지!”

  “뭐, 뭐하는 검까?”

  갑자기 박수를 친 치아키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테토라의 상의에 걸쳐주었다. 블랙 자켓 위에 레드 자켓이 겹쳐졌다.

  “아직은 크구나! 슬슬 물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준비하지 않았대도.

  테토라는 허리를 들썩일 정도로 재채기를 크게 하고는 손등으로 코를 닦았다. 지난밤에 언제 그렇게 비가 왔냐는 듯 맑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아무 것도 떠다니지 않았다. 테토라는 눈부신 창밖을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밤이 지났을 뿐인데 어제가 멀게 느껴졌다.

  내심 치아키의 자켓이 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갑자기 연습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

  창문을 내려다보자 꿈만 같게도 그가 서 있었다. 테토라는 놀란 얼굴로 입김을 내뱉었다. 잠옷 바람이었지만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창문으로 달려든 터라 새파랗고 얼어붙을 듯한 영하의 바람이 뺨을 스치고, 금세 달아오른 열을 식혔다.

  “테츠,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감기라면서, 그렇게 얇게 입고 창문을 열면 어떡하냐.”

  “괜찮슴다! 대장은 오늘도 멋있으심다! 지나가는 길이었슴까?”

  “아, 그게 말이지. 여동생이 먹고 싶다는 간식이 편의점에서 파는 것이라 우연히 길을 돌아가다가 생각났다. 자고 있는 줄 알았다면 전화하지 않았을 텐데.”

  “너무함다! 저는 대장이 전화해줘서 좋았는데!”

  “하하, 밥도 먹고, 약도 먹은 거겠지?”

  “사나이 나구모 테토라! 빨리 낫기 위해 뭐든 하고 있슴다!”

  옷을 단단히 챙겨 입어도 역시나 겨울의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낫지 않은 감기 기운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졌다. 추위 때문에, 감기 때문에,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며 서로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테토라는 밝게 웃으며 창문에서 한참이나 그를 내려다보았고, 쿠로는 따라서 웃으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서 한참이나 그를 올려다보았다.

  “테츠.”

  원래도 큰 미동이 없던 목소리가 좀 더 단호하게 들렸다. 테토라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 비 맞지 마라.”

  쿠로의 대답을 끝으로 잠깐 의미 모를 정적이 흘렀다.

  “……싱겁슴다.”

  테토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쿠로는 주먹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곧 돌아가려는 듯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도, 지겹도록 자주 찾아오는 한파 주의보도, 비 대신 눈이 내려서 대신 맞을 수 없는 날도. 이 계절의 특권이다. 공기가 따스한 기운으로 녹여버리기 시작한다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차기 레드의 이름으로, 혹은 고등학교 2학년 생으로.

  “그러냐. 그만 가는 게 좋겠다.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

  “그럼 학원에서 보자.”

  기약 없는 인사를 뒤로하고 쿠로는 걸어갔다. 테토라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다시금 상체를 길게 빼서 최대한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벗어날 것처럼 아슬아슬한 움직임이었지만, 테토라는 개의치 않아 했다.

  “대장!”

  감기면서, 부르는 목소리는 티 하나도 나지 않는다. 가까이에서 듣는다면 숨소리가 다른 때보다 훨씬 크고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대장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셔!”

  쿠로는 테토라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단번에 뒤로 돌았다. 테토라의 말을 천천히 경청하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테토라는 그제야 자신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한 것에 행복한 기억뿐이라면 떨쳐내기 위해 뭐부터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애써 안 좋은 생각을 하지도 못한다. 점점 깨달아 가고 있었다.

  발자취를 따라서 걷기로 결심하다보니 그 길들이 온통 사소한 애정 투성이였다.

  테토라는 입술을 씹으며 쿠로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감기 기운 때문에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쿠로의 얼굴이 흐려졌다.

*

  “으아아아!”

  쿠로는 괴성을 내지르며 빗속을 뛰어다니는 테토라를 바라보았다. 부활동이 있는 날에 비가 오면 늘 흠뻑 젖은 채로 나타난다. 갑작스런 겨울을 맞이하고는 늘 그랬다. 운동장이 잘 보이는 1층에 내려가서 팔짱을 낀 채로 테토라를 바라보았다. 시노부와 미도리가 걱정하는 듯 보였지만 테토라는 그들에게도 빗속에서의 수련은 자신을 단단하게 해줄 거라며 잔뜩 시끄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쿠로는 팔짱을 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일그러지는 얼굴과 흠뻑 젖는 도복이 무거워져서 힘에 부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빗속에서 울음을 털어버리는 건 아닐는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테토라가 그만 둘 즈음이면 무도장으로 돌아갔다. 곧 들어올 테토라를 기다리면서 한참이나 조용히 있었다.

 

 

*

 

 

  자취를 감춰버린 눈들의 자리를 벚꽃이 채웠다. 모두 축복을 받으며 앞으로의 길에 행복을 바랄 때, 테토라는 치아키에게 유성 레드 의상을 받았다. 사진을 찍자는 치아키의 말에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모두 옹기종기 붙어서 밀착했다. 결국 치아키가 마구 끌어안는 바람에 사진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포즈를 잡자는 말에도 질색하는 바람에 유성대가 모여 있던 곳은 주변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레드의 의상을 어깨에 걸친 채로, 치아키와 카나타가 테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멀찍이서 눈에 띄는 그들을 바라보던 쿠로는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로 웃었다.

  테토라는 생각했다.

  아직 레드의 소매가 자신의 팔보다 길어서 다행이라고. 이것마저 짧았다면 다시금 미열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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